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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 줄거리 / 결말 / 실화 (스포 O)

by 다락실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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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드라마, 스릴러 

미국

103분

 

감독

피터 랜즈먼

 

출연

리암 니슨 - 마크 펠트 역

다이안 레인 - 오드리 펠트 역

마이카 먼로 - 조안 펠트 역

줄리언 모리스 - 밥 우드워드 역

마이클 C. 홀 - 존 딘 역

이크 바린홀츠 - 안젤로 라노 역

토니 골드윈 - 에드 밀러 역

마튼 초카스 - L. 패트릭 그레이 역

조쉬 루카스 - 찰리 베이츠 역

브루스 그린우드 - 샌디 스미스 역

톰 시즈모어 - 빌 설리반 역

브라이언 다아시 제임스 - 로버트 쿤켈 역

 

영화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 줄거리

영화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 줄거리는 제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

blog.naver.com/daraksil_hyejin/222128630074

 

영화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 줄거리 결말 (스포 O) 마크 펠트 워터케이트 실화 영화

Mark Felt: The Man Who Brought Down the White House 개요 드라마, 스릴러 | 미국 | 103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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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 결말

마크 펠트는 집에서 반송된 편지를 통해 조안의 위치를 찾아낸다. 패트릭 그레이 국장은 백악관 입장을 설명하고 정보 유출자가 마크 펠트인걸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 마크 펠트는 그럼 왜 해고를 하지 않았냐 물어보는데 패트릭 그레이는 마크 펠트가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 해고를 하지 않은 거라 한다. 마크 펠트는 사무실 도청 감시를 다시 하는데 빌 설리반은 백악관이 모든 걸 청소할 거라는 정보를 얻게 된다. 그러면서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닉슨을 선정할 거라면서 자리를 뜬다. 대선 두 달 후 패트릭 그레이 국장이 밤중에 마크 펠트를 찾아왔는데 패트릭 그레이는 닉슨이 후버를 그리워한다며 자신에게 FBI 국장 영구직을 줬다면서 빌 설리반이 밑으로 들어올 거라 한다. FBI를 청소할 시간이라고 했다면서 그들은 마크 펠트를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뭔가 가지고 있다면 자기에게 달라면서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다 한다. 다음날 FBI에 출근한 마크 펠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빌 설리반을 만나는데 그는 자리를 보존할 수 없다며 아무도 내부고발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쓴소리한다. 에드 밀러 요원이 데리고 온 클락 요원에게 딸 조안의 소식을 듣게 되고 이어 마크 펠트는 기자 샌디 스미스를 만나러 가서 FBI가 붕괴되고 있다면서 모든 비밀을 샌디 스미스에게 얘기해 준다.

대선 3개월 후 마크 펠트와 패트릭 그레이는 인사청문회를 받으러 간다. 패트릭 그레이는 의원들에게 기밀 파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당황하고 그러다 패트릭 그레이는 존 딘 고문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자료를 요구해서 82개 보고서를 넘겼다 한다. 의원이 누구 지시냐고 물어보자 대통령에게 지시를 받은 거라 말한다. 이후 닉슨 대통령의 측근들은 사임하고 패트릭 그레이도 FBI 국장에 임명되지 못한다. 마크 펠트는 아내 오드리 펠트에게 딸 조안 펠트를 찾았다면서 같이 데리러 간다. 조안 펠트는 한 아이를 안고 있었고 마크 펠트는 둘 모두를 안아준다. 조안 펠트는 아빠의 눈을 볼 수 없었다고 하자 오드리 펠트는 어릴 때는 아빠가 다 돌봐줬다면서 딸을 위로한다. 마크는 딸을 찾고는 아내 오드리 펠트와 한 약속을 지킨다.

마크 펠트는 31년간 FBI 생활을 청산하고 떠나는데 요원들이 마중 나와서 박수를 보낸다. 이후 닉슨은 스스로 사임하고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4년 후 마크 펠트는 후버 시절의 FBI에 의한 시민권 침해 조사 대배심에 피고로 출석해서 자기가 도청을 지시한 거라 증언하면서 내부 고발자를 언급하며 증언을 이어가는데 한 배심원이 내부고발자 맞냐 묻자 머뭇거린다. 마크 펠트는 불법 사찰로 유죄를 선고받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사임하고 사망 전 자신이 워싱턴 포스트의 정보원이었다 밝힌다.

 

 

 

(왼쪽부터) 마크 펠트 / 밥 우드워드 / 리차드 닉슨

영화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 실화

1972년~1974년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정치 스캔들, 대통령이 임기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간 대 사건이다.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 사례

1972년 6월 17일 밤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입주해있던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의 경비원은 괴한의 침입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호텔에 출동한 경찰은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는데 범인들은 단순 절도라 주장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단순 절도 법에 어울리지 않는 거물급 변호사가 나타나 이들을 변호하고 일당 중 1명이 가지고 있던 수첩에서 백악관 보자관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발견돼 언론의 관심을 끈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 재선 위원회를 만들어 차기 대선을 준비 중이었는데 하워드 헌트가 재선 위원회 실무자였다. 게다가 경찰 수사 결과 이들은 2주 전에도 민주당 사무실 침입을 했고 이번 침입은 고장 난 도청기 교체하려던 게 목적이라는 게 들통난다. 단순 절도가 아니라는 의혹이 커지자 FBI가 직접 수사에 착수했다.

FBI가 개입할 정도로 일이 커지자 닉슨과 주변 측근 인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 시작한다. 닉슨은 CIA에 FBI의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최대한 은폐하라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당시 CIA 국장은 훗날 증언하기론 은폐, 특히 증인 매수 및 입단속에 필요한 돈을 CIA 자체 자금으로 처리하라는 것이 닉슨 측의 명령이었다 하는데 이는 CIA 자금 외에는 마땅히 닉슨이 남들 눈에 안 띄게 쓸 수 있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CIA로서도 이미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함부로 돈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증인 매수 계획은 실패한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후보로 조지 맥거번이 선출되고 닉슨과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되자 워터게이트 사건은 점점 여론의 관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괴한들이 침입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는 별다른 기밀문서도 없어 맥거번 후보나 민주당 쪽에서도 실질적 피해는 없었다면서 이 사건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사실 당시 민주당은 험프리와 맥거번의 대선 후보 경선이 너무 치열해 나머지 당이 쪼개져 있었고 부통령 후보가 도중 교체되는 등 난장판이었다. 이 때문에 일관된 선거전략을 세우지도 못했다. 결국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은 선거인단 538표중 530표를 쓸어가는 압승을 거둔다. 유권자 득표율에서도 60%가 넘었다. 사실상 대통령 선거 시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언론들도 일반적인 선거 보도에만 열 올렸지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미 구석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다만 워싱턴 포스트에서만 이 사건을 계속 보도했는데 별다른 여론의 반향은 없었다. 오히려 친 닉슨 성향의 언론들은 워싱턴 포스트를 가짜 뉴스라 공격한다.

하지만 대선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사법 절차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 수사와 검사의 기소를 거쳐 재판 끝 1973년 1월 도청기 설치한 범인들은 유죄를 받는다. 그리고 FBI는 범인들의 배후에 관해 계속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닉슨이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무렵 상원 청문회가 열려서 전국에 생중계가 된다. 그리고 청문회에 나온 알렉산더 버터필드 전 대통령 부 보좌관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는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비밀장치가 있고 닉슨 대통령이 사건의 은폐 공장에 관여하는 내용도 녹음되었다는 증언을 해버린다. 특별검사와 상원 특별위원회는 녹음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교주하지만 닉슨은 행정 특권을 이유로 들며 거절한다.

행정 특권은 미국에서 행정부 인사들에게 보장하는 일종의 비밀 보장 특권이다. 삼권분립에 의해 사법부, 의회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이르고 있다.

1973년 10월 19일 닉슨 대통령은 테이프를 제출할 수 없다면서 워터게이트 도청을 조사하던 청문위원회를 와해할 목적으로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기로 마음먹고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부 장관에게 아치볼드 특별검사를 해임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다음날 엘리엇 법무부 장관은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장관이 사임하자 닉슨은 이번에는 장관 대행을 하게 된 윌리엄 러클하우스 부장관에게 해임을 명령하지만 부장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장관과 부장관 모두 닉슨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자 대행의 대행이 된 법무부 서열 3위인 로버트 보크 송무 차관까지 해임명령이 내려왔고 그는 닉슨의 명령을 따르면서 아치볼트 특별검사는 해임된다. 단 하루 만에 닉슨은 수사방해 때문에 특별검사가 해임당하고 법무부 장관, 부장관이 사퇴한 사태를 두고 언론은 이 특별검사 해임 사건을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라 부르며 닉슨의 무분별한 권력 행사라 비판했다. 닉슨은 결국 사건을 수사하던 특별검사를 날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통령 권력을 남용해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 미국인들이 닉슨에게 등을 돌린다.

1973년 11월 17일 닉슨은 특별검사 해임으로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고자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는데 자기는 사기꾼이 아니라 말한다. 이 발언으로 오히려 미국인들은 닉슨은 사기꾼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전면적 부인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이 말한 사기꾼이라는 단어만 남았고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급해진 닉슨은 기껏 해임한 특검도 다른 사람으로 다시 임명하고 테이프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는 걸로 합의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제출하지만 이때 기록을 자체 검열했다. 이때 다시 들고 온 주장이 통치행위론이었다. 대통령이 정무적, 정지적 판단에 따라 기록 공개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기록을 공개하는 것은 국가 보안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이어간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 후새로 임명된 특별검사 레온 자보르스키는 연방 항소법원에 이의를 제기했고 항소법원은 이를 연방 대법원에 올리게 되었다. 8명 대법관은 만장일치로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 판결 내렸다. 미국 정부 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판결은 대통령의 권한과 특권의 한계를 정리한 기념비적 판결로 꼽힌다.

결국 닉슨이 주장한 통치행위론에 따른 대통령 특권은 연방 대법원에 의해 부인된 셈이다. 대법관들 중 절반이 닉슨이 임명한 이들로 채워져있었지만 이 건에 대한 대법관들의 판단은 일치했다,

그리고 새로 제출된 테이프에서 닉슨이 거짓말 한 사실이 들통난다. 닉슨은 계속해서 워터게이트 사건 및 사건 은폐 공작과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테이프에는 CIA 국장에게 직접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돼 있었다. 그리고 주변 측근들과 사건에 관해 논의한 내용들도 있었다.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마저 닉슨에게 등을 돌린다. 권한 남용과 사법 정차 방해로 탄핵 직전까지 몰리자 탄핵이 가결되기 전 1974년 8월 9일 닉슨이 자진 사퇴해 사건은 일단락된다.

하야 성명 후 그가 퇴임하는 시각에 이르기 전 에어 포스 원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귀향길에 올랐는데 비행 중 워싱턴 DC에서 포드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자 규정에 따라 닉슨의 탑승기의 기장 랠프 앨버타치 미합중국 공군 대령은 비행하던 중 에어 포스 원에서 기체 고유 부호 SAM 27000으로 호출 부호를 변경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진 건 닉슨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사법체계에서 위증은 엄청난 중죄고 전국적으로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지지자들 마저 등 돌린 것도 도청한 게 들통나서가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 도청을 안 했다고 거짓말한 것이 이유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두 기자가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을 밝히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들에게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정보원이 있었는데 밥 우드워드는 이 사람을 딥 스로우라 칭했다. 이의 정체는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2004년 밝혀지는데 바로 사건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였다. 마크 펠트와 연락한 사람은 밥 우드워드였는데 둘의 인연이 기이하다. 밥 우드워드가 해군 장교 재직 중에 백악관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마크 펠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원 동창이었던 둘은 친해졌고 마크 펠트는 이후 밥 우드워드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장교 제대 후 중앙지로 가라 조언해 준 것도 마크 펠트였다. 마크 펠트가 밥 우드워드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과정은 첩보극을 연상케한다. 밥 우드워드는 마크 펠트와 만나고 싶을 때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고 마크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주차장에서 다음날 새벽 2시에 만났다고 한다. 만약 마크 펠트가 밥 우드워드를 만나고자 할 때는 뉴욕 타임스 20면에 시계를 그려놨다고 한다. 밥 우드워드가 정보를 물어오면 칼 번스타인이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이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의 공로로 무명 신참 기자에서 대기자가 되었다. 이 둘은 1971년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3년 동안 이 사건에만 매달렸고 결국 대통령 퇴진을 이끌어냈다. 이런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한 장기간 심층 취재와 보도는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속보 경쟁만 하던 미국 신문, 방송에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마크 펠트 말고도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벤자민 브래들리와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의 역할도 컸다. 벤자민 브래들리는 위험할 수 있는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서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냈고 캐서린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붕괴를 각오하면서 두 기자를 보호했다. 이전에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 가족들을 취재하며 무단 침입을 통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해서 닉슨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고 펜타곤 보고서를 전량 입수해 뉴욕 타임스와 함께 보도해 닉슨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들은 백악관에 들이지 말라 지시 내릴 정도로 닉슨 행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실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는 물론이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던 걸로 전해진다. 30년 동안 정보제공자를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는 언론사의 귀감으로 평가받았다. 내부 고발자의 중요성도 이 사건을 통해 알려지고 이 사건을 통해서 일개 지방 언론사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주류 언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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